알수록 베일이 벗겨지는 느낌. 나는 정말 누구인가?

내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다. 어떤 모습은 보고싶지않지만 계속 나오고
의외의 어떤 모습은 나를 당황시킨다.

“나” 를 찾아 더듬더듬..

반백이가 넘어서 “나를 찾아서”라는 말이 슬쩍 어색하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도 아니고 그럼 여적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어? 라는 원색적인 질문도 나올법하다.

그런데, 정말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듯하다. 나로 살았다기 보다는 살아야하는 모습으로 살아왔지 싶다. 말 잘듣는 착한 딸로 살았어야 했고, 순종적인 여자의 모습으로 살아야했고, 반항하지않는 학생으로 , 또 열심히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야했다. 나는 누군가? 순간 순간 혼란스러울때, 이런 혼란이 꼭 행복해서 쓸데없는 생각의 사치에 빠진것 처럼 나를 질책한적도 있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한자 더 하지.. 나를 나무랬다. 내가 누구긴 누구야. 나지. 이런쓸데 없는 생각이나 하니가 너 가 이렇게 살지.. 조금만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빠져들면, 내 자신이 겉잡을수없는 혼란속으로 빠져들것 같아, 항상 미리미리 나를 보호(?) 한것 같기도 하다. 안그래도 사는것도 정신없어죽겟는데 더 이상한 생각을 보탤필요가 있을까..

그래서일까? 나는 종교에 그리고 확실함을 주는 종교를 택했던것 같다. 워낙 신을 좋아하고 하늘을 좋아하고 신과 연결된걸 궁금해하고 좋아했었다. 이유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그랬다. 확실함을 주고 좋은 음악과 깔끔한 교회와 세련된옷을 입고 다니는 기독교가 나에게는 혼란을 피해서 도저히 이해할수없는 나의 삶에 명확한 길을 제시해주는것 같았다.

난 혼란이 싫었고 , 혼란을 피해서 내가 갈수잇는 한 가장 멀리 도망친것 같다.

어린시절..

국민학교때 도덕시간이었나? 선생님이 방학숙제로 외가댁 친가댁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을 적어오라고 한다. 정말 짜증이 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을 알아오라는 숙제가 나를 화가 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들어내지않고 특히 우리 가족은 더더욱 감추고 싶었던 때였는데 무슨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까지 적어오라고 하나..기가 막혔다.

“아니 ,무슨 학교에서 이런걸 다 해가지고 오라고 그러는거야?”

아무리 어려도 학생에게 왜 이런 숙제를 해오는지 말이라도 좀 해주면 알수없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똘똘 말려있는 어린 마음이 조금이나 타협점을 찾았을텐데 이유를 모르니 이상한 가정을 가진 나에 대한 수치감만 더 깊어졌다.

친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알수없으니 쓰지않고 그저 외가의 내용을 쓰는데 뭔 한 할아버지에 와이프 할머니가 여러명이 있고 각각의 할머니아래에 삼촌들 이모들이 주르륵 있고.. 자세한 내용은 잘 이해가 되지않는 나이였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가정조사질문.

그 뿐이 아니였다. 우리때는 한번씩 학생 가정상황설문지나 조사서같은것이 잇어서 담임선생님이 한번씩 질문을 봐가면서 물어봤다. 질문은 이런것들이였다.

집에 텔레비젼있는사람 손들어?

그럼 몇명이 손을 들면 , 선생님이 명수를 기입했다

이런 유치하지만 재미있는 질문들중에 종종 이런 질문도있었다.

” 부모님들중 이혼한 사람있으면 손들어봐?”

그럼 그 중에 내가 혼자 손을 슬면시 들었다. 앞에 텔레비젼있는 사람, 전화기 있는 사람, 냉장고 있는 사람중에는 거의 손을 들지 않다가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 질문에 나혼자 손을 들었다.

” 어, 너.. 응 알앗어. 손 내려..”

그럼 아이들이 누구 누구? 하면서 두리번 거리다가.. 어.. ” 이금연.. ” 한다. 그때의 수치감과 모욕감이란 말도 못했다.

이름..

어렸을때 이런 수치감과 모욕감은 나를 표현하는 모든것이 세트처럼 움직인듯했다. 내 이름도 그 중 한몫을 차지했다. 이금연이라는 이름은 실상 그리 흔한 이름이 아니다. 그 많고 많은 평범한 이름중에 왜 하필이면 금연이라는 이름을 붙엿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이름에 큰 뜻이 있는것도 아니고 비단 금 자에 제비연자. 비단제비라는 이름인데.. 이쁘다고 이런 이름을 붙여줘서 나의 학생시절의 입학초기에는 꼭 한번씩 나의 이름때문에 전 반아이들이 웃는 일을 벌어지게 했다.

중학교때는 이런일이 있었다.

첫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자 자기 이름하고 번호를 대봐. 내 차례가 와서

” 27번 이금연”

” 야, 장난 치지 말고, 이름 대라니까..”

” 제 이름인데요..”

” 이 자식이.. 진짜.., 장난치지말라니까, 너 번호가 몇번이야?”

이런 실랑이를 몇번하다가 담임선생님이 내 번호를 확인하고서야

” 어머, 너 이름이 금연이야? 무슨 뜻이니?”

담임 선생님 전공이 한문이이여서 인지 이 선생님도 신기했나부다. 어떻게 여자 애 이름을 금연이라고 지엇을까..

나를 정의하는것들의 수치

어렸을때 나를 표현하는것은 나의 외모, 나를 둘러싼 가정환경, 부모, 나의 이름, 내가 사는 동네일텐데, 나는 이런 기본적인것들이 수치스러움의 덩어리들이었다.

이런 수치스러움으로 난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아이로 되었다. 학교에서는 국민학교 5학년때까지 말을 하지않지만 미술을 잘 하는 아이로 선생님에게 기억이 되었다. 미술시간에 만든것들은 선생님이 늘 뽑아서 뒤에 걸어두셧다. 그때까지 아마 난 말을 하지않는대신에 나의 표현을 미술과 글로 표현했던것 같다.

6학년이 되면서 아마 사춘기의 시작이었던것 같다. 이렇게 말을 하지 않고 잇으니 나의 존재는 뭍혀버렸다. 특히 그때 이모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있었을때인데, 이모의 자식 극성쟁이 쌍둥이 오빠들은 자신들이 저지른일을 다 내가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 내가 그집에 살면서 엄마가 한달에 일정한 하숙비를 내고 달마다 김장이며 살림의 소소한 목돈 들어가는일을 나의 엄마가 조달을 해서 그런지 이모는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그리 뭐라고 하지않았다. 그래서 쌍둥이들의 역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나는 억울한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내가 하지않앗다는 말을 강하게 하지 못하고 어쩔때는 머뭇거리다가 진짜 내가 한일이 되어버린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는 억울함을 당하던 말던 그리 나의 삶에 큰 변화가 없으니 억울함을 밝히고 싶은 의지도 없었던듯했다.

5학년 11살의 나는 삶이 너무 무겁고 너무 지쳤고 재미가 없었다.

알수없는 큰변화

그러던 날 나에게 무슨 큰 변화가 왔다. 어떻게 된지는 모르겟지만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었다. 갑자기 내가 적극적으로 말을 해야겟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이렇게 하는것은 내가 하는 행동도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것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안나는데 한순간 내가 말을 하기로 했다.

지금 보면 그때 너무 마르고 빈혈이 심하고 내성적인 나에게 할머니 신이 내리지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전까지 빈혈이 심해서 어지럼증으로 자주 넘어졌다. 그래서 병원을 다니기도 했었는데 6학년이 되면서 그 증상이 많이 없어졌다.

6학년이 되면서 나는 내성적인 학생, 이름도 모르는 존재감도 전혀 없는 학생에서 말이 많고 재미있는 거의 오락 부장같은 아이로 변했다. 참 신기한 일이였다.

내 성격이 바뀌니 교실의 쓰다버려진 몽당연필같던 나의 존재가 하루아침에 주목받는 아이가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학급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웃음을 주었다. 난 내가 어떻게 그때 그런 행동과말을 햇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않는다. 지금보니까 그때 신이 내리지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 그때 우리 서씨쪽 할머니가 내리셔서 굶어죽던지 빈혈로 죽던지할 애를 살려주기위해 나오지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두개의 나 ( 겉자아, 속자아)

그 후부터 난 나의 마음속의 나와 밖에서 보여지고 나의 의도와는 달리 행동하는 애가 공존한듯하다.

난 앞에서 노래를 하거나 내가 말하는걸 보고 사람들이 웃는일을 하는게 싫었다. 광대같았다. 내가 광대야? 그런데 내 안의 생각과 달리 나는 이미 교실 앞에서 그당시 유행했던 이선희의 ” 질투”를 노래하고 있었고 친구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6학년때 담임은 학부모나 학생에게 호랑이 선생으로 유명한 김봉구 선생이였다. 지금 세상에 이런 선생이 학교에 있으면 정말 그 선생은 감방에 갔어도 열두번은 더 가야하는 선생이였다. 부모환경이 어렵고 가난한 아이들 특히 남자아이들을 자기가 화가 나면 어떠한 꼬두리를 잡아서라도 뚜들겨 팼다. 교실앞에서 교실 뒤까지 아이를 싸대기를 갈기면서 아이가 뒤로 물러서면 따라가면서 발로 손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했다. 여학생들에게도 그런 구타가 예외는 아니였지만, 남자아이들 보다는 강도가 덜했다. 하지만, 성적인 희롱의 말을 아이들에게 했다. 여자아이들를 체벌할할때는 아이들을 책상에 엎드려눞게 해서 막대기를 대고 덩치가 큰 아이들보고는 ” 아이고 , 이 새끼는 아주 처녀 궁댕이를 가지고있네.. ” 하고 때렸다. 그런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직 그 의미가 어떤의미인지를 모르는때라 깔깔 거리고 웃엇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선생이라는 김봉구는 미친놈이지 선생이라고 할수없는 인간이지 싶다. 또한 방학이 되면 각각 학생의 집에 가정방문이라는 이름으로 방문을 해서 은근슬쩍 돈을 요구하기도했다. 나중에 따로 들은이야기는 우리반에 잘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이미 김봉구가 오면 돈 봉투를 알아서 준비해서 줘야 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할머니 신이 내리지않았으면 그 악마같은 김봉구아래에서 6학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그나마 까불거리고 내 정신으로 하지않는 이상한 행동으로 그의 눈에 환심을 사서 잘넘어간듯하다.

유년의 나 . 무의식의 자아형성시기

현대 영성생물학자 브루스 립튼의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거의 10살 이전에 형성된다고 한다. 나의 11살까지의 사정은 이러했다. 따라서 나는 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보다 반대의 모습이 많지않았을까 한다. 창피함과 수치심이 가장 크지않았을까.

들어나는 혼돈..

국민학교 6학년때의 큰 변화는 그후 계속 되었다. 나의 속 자아와 내가 표현하는 나의 겉자아는 는 늘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다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늘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라는 생각만 했다.

이런 나의 모습은 대학교때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혼돈의 그자체였다. 겉으로는 활달하고 밝아 보이고 위트있으면서 자기의주장이 분명해보이는 내가 남자친구 하고의 개인적인 관계가 되면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이 나왔다. 의존적인고 히스테리적인 행동 무력하고 모든걸 남자친구한테 의지했다. 남자친구하고의 관계가 나의 사회생활의전부가 되어버렸다. 내 안속에 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남자친구하고 있을때 들어났다. 혼란 그자체였다. 그때 어린 청춘이였던 나의 남자친구는 이런 나의 이중성이 더 매력적이었나보다. 자기와는 있을때는 아주 연약한 모습인데 다른 사람과 있을때는 그 누구보다도 사교적인고 리더같은 모습인 내가 신기했을수 있을것 같다.

롤모델

어떻게 행동해야하나..

그때부터인가, 난 롤 모델이 극심하게 필요했다. 외부에서 보는 나와 내가 느끼는 나와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보이는 내가 달라서 너무 혼란스러웠다. 공통점을 찾아서 중심을 찾아야되었다. 내가 당장 어떻게 행동을 해야되는지 조차도 몰라 당황스러운적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화를 내야하나아니면 참아야하나. 나라는 사람은 이럴때 쿨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삶에서 부딛치는 모든상황에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나? 어떻게 해야하지? 누군가가 와서 이럴때는 이렇게 행동해야지..하고 말해줫으면 좋겠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내가 에이아이여서 누군가 내 머리에 데이타를 입력해줘서 모든상황에 그런 매뉴얼대로 행동했으면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하나.. 화를 내고 싶은데 왜 내가 화를 내는지 모르겟고, 왜 아니라고 “노” 라는 말을 못하는지..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병신같고 미친녀같은지.. 내안에서의 혼란은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되고 싶고 닮고 싶은 사람을 찾기로 했다. 그때 사회적 경력으로 멋잇어보이는 여성리더의 책을 사서 다 읽었다. 하다못해 드라마의 주인공의 한 대사가 멋있어보이면 그걸 은근슬쩍 따라서해보기도 했다. 머리 스타일이며 말하는 법, 또는 옷입는것 까지 따라했다.

윤혜미 교수님

그러던중, 내가 정말 따라하고 싶은 분이 나타났다. 나의 대학교 은사 윤혜미 교수님이셨다. 교수님은 미국 코넬 대학에서 학위를 따셧는데 동양에서 온 학생중에 최단기 박사학위를 따신 분이셧다. 이런 분이 내가 다니는 학교에 교수님이셧다. 난 리틀 윤혜미라는 말을 들을정도로 윤혜미 교수님 바라기였다. 교수님 강의는 거의 모든걸 다 들었고 교수님이 추천하는 강의도 싸그리 들엇고 교수님덕분에 내 전공이 아니더라도 다른 전공의 강의를 들을수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덕에 사회복지학을 전공 3학년때 고미사, 아동놀이 치료, 정치학개론 등 다른 과의 개론학이나 다른과의 전공수업을 나의 교양수업처럼 들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이렇게 교양수업을 다른 과의 전공수업을 들은 사람은 나 하나였던걸로 기억한다.

Leave a Reply

Trending

Discover more from human Strategy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