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 당연히 죽는건 당연한건데..그걸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타부시했을까.. 죽음이 뭐라고 아이를 그 고생을 시켰을까…

꽃봉오리
밤새도록 웅크리고 있는 몸이 여기저기 뻣뻣하다는 신호를 한다. 몸도 몸이지만 한가지 생각만 하고 있던 머리속에 꽉 찬 느낌이 든다. 막둥이와 뒷마당에 나간다. 멀찌막한 산 머리에 눈과 산신령이 타고 놓고간듯한 구름들이 마을로 내려앉았다. 엊그제 부지런한 미국인들만 하는 섬머타임 탓에 나름의 시차 적응으로 피곤한 몸이 혼란스럽다. 썸머 타임으로 한시간을 못 자는구만 아직도 우리 동네 산은 눈으로 덥여있다. 고개 돌려 한발자욱 앞으로 내딛는데 내 눈에 뭔가 빨간것이 들어온다. ” 어!” 맛있게 먹었던 씨를 심어서 자란 백도 복숭아 나무에 꽃봉오리가 올라와 살짝 얼굴을 들어낸다. ” 아니 언제 이렇게 다시 꽃이 폈지?” 아직 산 꼭대기에 눈도 안 녹았는데 이렇게 꽃을 펴서 혹시나 얼지 않을까 은근 걱정이 된다.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서 사알짝 꽃잎을 들어내고 있는 찐한 분홍 꽃 봉오리를 보니 마음이 싸해진다.
마미 핑크
작년 이맘때부터 면역저항반응이 시작되 고통속에 있던 우리 루비가 제일 좋아한 색은 마미 핑크였다. 어렸을때부터 흥겹게 듣고 따라 부르던 마미 샤크샤크의 노래중에 핑크 상어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난 부터 루비의 가장 좋아하는 색은 마미 핑크였다. 얼굴의 근육이 굳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해 사용하는 어휘가 많지않았지만, 꼭 본인이 좋아하는 단어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했다. 그 중에 ” 마미 핑크” 는 우리 루비의 단골 언어중에 하나였다.
이른 봄 뒷마당에 발그레 모습을 내보인 백도 꽃봉오리는 우리 루비가 그렇게 좋아하던 마미 핑크의 색을 낸다. 무던해졌겠지 했던 마음은 무던해진게 아닌가 보다. 화상당한 상처같은걸까.. 잠깐 쓰라린 상처의 고통이 잠시 멈춰있는것이지 상처가 없어진것은 아닌가 보다.
백도나무의 꽃봉오리가 나의 상처를 건딘다. 이제는 쓰라린 아픔보다 아련함이 남아있다. 딱 작년 이맘때였다. 우리가 이제 결정을 해야되는 시간이 왔다는걸 알았다. 나와 남편은 지옥속으로 다시 들어가야했다.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척, 아기가 아프지만 않을수있다면 그 어떤것도 괜찮다고 서로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우리가 어떤 고통이 있어도 루비의 고통하고는 비교도 안된다는걸 알았다.
작년 이맘때도 이런 꽃 봉오리가 피었었겠지. 기억이 나지않는다. 작년 이맘때부터 난 폭탄이 터진 전쟁터 속에 있었던듯 하다.
그때 남편이 하염없이 했던 말이 있다.” 그때 보내줬어야했는데..” 나 또한 하염없이 나를 질책했다. ” 왜 그렇게 맘이 굳지못해서 아이를 지금까지 끌고 와서 이 고생을 시켰냐.. ” ” 죽는게 뭐라고.. 다 죽는데..그게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왜 그렇게 미련하고 멍청했어..”
무당이 된것이 아이의 명줄을 이으라고 준거라고 확신도 해서 생각만 나면 어떤 아이의 모습만 보면 계속 굿도 하고 기도도 하고 내가 할수있는 모든걸 다 했다. 정말 이어졌다. 명줄이 이어졌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고통들이 한 가득씩 들어찼다. 하루의 명줄을 이으면, 한가마니씩 루비와 다른 아이들의 고통들이 꿰어졌다.
죽음에 대한 생각
무당이 되어 죽음의 그리 두려운것이 아니고 문하나 열고 가는거라고 알려준걸 이 미련한 무당은 죽음하고 싸우라고 한줄 알았다. 속절없는 한숨만 나온다.
죽음이 뭐라고 아이를 그 고생을 시켰을까…
태어나면 당연히 죽는건 당연한건데..그걸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타부시했을까.. 어찌보면 내 새끼 내가 낳고 내 품에 있는 동안 후회없이 이뻐하고 타고난 시간이 일찍 가야해서 내가 또 가는것도 다 챙겨준것이 축복중에 축복일수있던건데.. 죽음이 두려운것은 혼자만이 감당해야하는 절대 고독이라면, 우리 루비는 죽는 그 순간까지 양쪽에 아빠와 엄마가 손을 잡고 같이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그 절대고독도 없이 나의 품에 지 아빠 품에 자는듯이 간거니 축복일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만 하는거지 자식이 먼저 나보다 죽는건 너무 가슴아픈일이라고 단정해서 생각한다. 과연그럴까?
산다는게 길게만 사는게 좋은가? 짧게 살아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사는지 알고 사는게 더 낫지 않을까? 성경에 하루아침에 가족과 자신이 가진 모든것을 잃고 건강까지 잃어버려 하루가 사는것이 고통의 나날이 된 욥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욥은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그날에 내가 태어나지 말아야했었는데.. 그날이 저주의 날인데.. 길게 살면서 혹시 이런 순간 만을 산다면 과연 길게 산다는것이 축복일까?
죽음의 나이
죽음의 나이가 있을까? 죽음은 어느 나이든 아쉽다. 80세의 따뜻한 할머니의 죽음도 남아있는 가족한테는 아쉽다. 몇달전 경주최씨 집 손녀 할머니께서 거의 100세가까이 되셔서 별세를 하셨다. 남아있는 식구들 뿐만아니라 그분을 아시던 분들은 죽음으로 다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지못해 많이 아쉬워했다. 어떤 나이든 어리던 나이가 많던 죽음은 늘 아쉬운거다.
인간 각자는 자기의 죽음의 나이가 있을거다. 자동차의 수명이 있듯이, 나무의 수명이 있듯이 , 다 각자의 죽음의 나이가 있지않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 루비의 죽음의 나이는 4살 정도 였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무당엄마와 딸바보 아빠는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찟겨 가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며 딸의 죽음을 밀어냈다. 기도로 굿으로 치성으로 울음으로 고독으로 결단으로.. 인간이 할수있는 모든걸 다 해서 죽음과 싸웠다. 죽음에 대한걸 무조건 나쁜거 지는거 절대 일어나면 안되는거 라는 생각만 있어서 무조건 죽음을 밀어내야된다고 생각한것 같다. 이부분이 가장 후회가 많이 된다.
” 왜 이렇게 미련했을까..”
절대시간
앞산봉오리에 아직 눈이 가득해도, 자연의 절대 시간은 있는 가보다. 아직까지 으쓱해서 히터를 끌수없어도 나뭇가지의 꽃봉리는 피고 앞마당의 봄 수련화는 잎을 들이 민다. 세상만물에 이런 절대적 시간이란게 신의 한부분이 아닐까싶다. 인간에게 죽음이 주는 선물은 우리에게는 각자 다 절대적인 시간이 있다는걸 알게 해준다. 아무도 그 시간을 가늠할수없지만, 그 시간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존재한다. 자식이니까 당연히 나보다 오래 살겠지라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무지를 넘어선 굉장한 착각일수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할수있나. 황망하게 목숨을 읽은 젊은 청년과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이런 절대의 시간, 죽음을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 옆에 있는 아이들이 너무 소중하다. 남편도 가족도 그리고 나를 둘러싼 좋은 사람들도 더 소중한다. 죽음이 슬픈건 어쩔수없는 단절감을 준다. 그러니 절대시간이 서로 다른 우리는 어느순간에 너무나 당연히 함께 하던것들을 할 수없는 순간들이 언제든지 올수있다. 이런 인식을 하면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남편에게 돈을 왜 안벌어오냐 라는 말따위들은 가장 불필요한 말이 된다. 돈보다 어떤 이루는 업적보다 더 소중한것이 확연히 들어난다. ” 함께 하는 시간과 순간들.” 이 너무 소중해진다.
죽음이 준 너그러움
뒷마당 산책을 끝낸다. 마미 핑크의 꽃봉오리를 보니 천사로 간 루비와 보낸 시간이 아련하게 밀려온다. ” 한순간도 좋지않았던 적이 없구나. ” 강아지 마냥 엄마 꽁무니를 졸졸 쫒아오는 막둥이를 본다. 이 녀석과의 시간도 정해져있구나 싶으니 벌써 아쉬움이 몰려온다. 몇일이면 만 7살인데 아직 어리광이 많다. 알파벳 소문자도 헷갈려하는것도 많다. 첫째를 키울때는 혹시나 아이가 또래와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모자랄까봐 아웅바둥했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이 든다. 나와 있는 시간을 늘 재미있고 즐거웠던 시간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다. 엄마와 있던 시간은 늘 재미없고 공부만 해야하고 뭔가 열심히 해야하는 기억보다 엄마랑 있으면 늘 재미있고 즐거웠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다. 남편과 다른 큰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것보다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거 그리고 같이 있지 못해도 나라는 존재는 당신들을 늘 응원한다는걸 알려주고 싶다.
죽음은 나에게 이런 너그러움을 가르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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